임광호 전도사의 순교

"당신들도 예수 믿어야 산다."

(1) 출생과 월남

   임광호 전도사는 1923년 3월 15일 황해도 신천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전도사인 어머니 사이에 9남매 중 6째로 출생하였다. 넉넉한 집안 덕분에 이북과 길림성에서 신학 및 기타 학문을 마음껏 배울 수 있었다. 신학을 마치고 목회를 시작하였지만 이북공산당원들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중에 1945년 민족이 해방이 되면서 남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2) 와리교회 사역

   월남 후 임 전도사는 부여 모 감리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삼례성결교회 조석우 목사의 소개로 1948년 3월 4일 전북 완주군 와리장로교회(현, 신와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하게 되었다. 와리교회는 모 교회인 석촌장로교회와는 거리가 멀어 3-4명의 교인들이 교역자 없이 예배드리던 교회였는데 임 전도사가 부임한 후 놀랍게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외지에서 들어온 전도사 하나가 200명이 넘게 교회를 부흥시키고, 동네사람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과 지도력이 점점 커져 가자 와리 공산당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산당 체제보다 교회와 임전도사의 세력이 커지게 되자 임 전도사를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게 되었다. 공산당원들은 교회 일에 시시콜콜 시비를 걸어왔고 “임전도사는 이북에서 온 자”라고 모략을 일삼기도 했다. 
   와리교회 장로들은 공산당들의 방해에도 모 교회인 석촌교회보다 부흥하고 있는 상황에서, 따가운 시선으로 인해, 임 전도사의 장래를 위해 내보내기로 결정하였고 결국 임 전도사는 와리교회를 그만두었다. 

(3) 하리교회 개척

   1950년 3월 27일 당시 전주 한일신학교 학생이었던 김복순 씨와 결혼을 한 임 전도사는 조석우 목사와 상의한 후 1950년 4월 16일에 와리와 하리의 중간쯤에 위치한 백한나 씨의 집에 천막을 치고 전경순 씨와 유정례 씨와 함께 하리성결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개척과 함께 와리에서 온 사람들과 많은 동네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됨으로 부흥하게 되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논밭을 다니며 치료하는 모습을 통해 각 동리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공산당원들은 교회부흥과 함께 지도력을 발휘하는 임 전도사를 못마땅하게 여겨 기회만 있으면 끌고 가서 강압적인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다.

(4) 6.25 한국전쟁과 고난

   삼례교회 건축 기성위원회와 삼례교회 집사인 유흥만 씨의 재목 희사로 현재의 하리교회 위치에 건평 20평의 성전건축을 막 시작하던 때에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삼례교회 박춘빈 장로가 “우리 다 같이 제주도로 피난가자.”는 제의를 했을 때, 사태의 심각성을 예감한 김복순 사모도 이에 동조하였으나 임 전도사는 “목자가 양떼를 버리고 어디를 가느냐?”며 거절했다.
   1950년 7월 10일 경 성전건축 상량식 잔치를 위해 온 성도들이 돼지 잡고 하던 분주한 때에 공산당이 찾아와 “잠깐이면 된다.”고 하면서 러닝셔츠 차림의 임 전도사를 데리고 갔다. 김복순 사모가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는 임 전도사를 찾기 위해 수소문해보니 삼례초등학교 치안대 독방에 갇혀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임 전도사는 교회와 성도들의 안부를 일일이 묻고는 “걱정하지 말아라, 곧 나가게 될 거다.”라며 오히려 사모를 위로하였다. 

(5) 순교

   그날 이후 김복순 사모는 교회를 계속 짓느라 바빴고, 성도들이 걱정할까봐 집으로 돌아왔으나 며칠 후 다시 면회를 갔을 때 임전도사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때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하리교회 백한나 집사와 삼례장로교회 강 장로 딸 등)에 의하면, 임 전도사는 옥에 갇힌 후에도 신앙의 지조를 굳게 지키고, 자신을 고문하는 자에게 전도하였다고 한다. “예수 안 믿는다고 하면 당장 살려준다.”는 회피에도 임 전도사는 “당신들도 예수 믿어야 산다.”고 더 강하게 전도하였다고 한다. 
   매일 밤 교회건축 중지할 것과 신앙 포기를 강요하는 고문에도 신앙의 정조를 굳게 지키는 임 전도사를 향해 공산당원들은 “이런 놈은 총알이 아까우니 몽둥이와 삽과 괭이로 때려 죽여야 한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1950년 7월 20일 저녁 6시 경에 임 전도사를 포함한 몇 사람이 삼례읍 와리 월산리 바위 밑으로 끌려가 순교했다. 나중에 사모와 신자 몇 명이 그곳에 피가 많이 묻어 있는 바위를 발견했다. 

(6) 김복순 사모의 삶

   공산당은 임 전도사를 죽이고서 2-3일 후에 김 사모마저 붙잡아 갔다. 그리고 남편에게 했던 그대로 “예수 안 믿으면 살려준다.”고 하면서 심한 고문을 하였다. 3일 동안 눈을 가리고 목에다 총을 들이대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갖은 회유와 협박을 하였지만 김 사모 역시 “당신들도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면서 “죽일 테면 죽이라!”고 달려들었다. 공산당원들은 “지 남편과 똑같구먼! 그 놈도 죽으면서 예수 믿으라고 하더니 이 년도…….”하면서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김 사모를 풀어주었다. 
   그 후 김 사모는 임 전도사가 순교한 하리교회 건축을 마무리하고 유복자인 임창희를 출산한 후 3년간 하리교회에서 목회를 계속했다. 그리고 완주군 용진교회에서 1년여 동안 목회한 후에, 1956년 전주성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보도자료

<국민일보와 한국성결신문에 보도된 기사>

<'활천'에 실린 글>